보라카이에서 여권을 잃어버리고 만난 인연

2014. 5. 15. 00:09라이프/소탈한 여행기

여행지에서 여권을 잃어버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여권을 잃어버리는 일은 소설책에도 거의 등장하지 않을 정도로, 몸과 마음을 놔버리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보라카이 여행에 동행한 실장님은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예를 들면, 아침에 일어나서는 반드시 화장실에 가서 일을 봐야하는 디테일함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함께 여행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동성 친구도 없을 거다. 

꼼꼼하고, 세심한 성격의 소유자와 여행을 한다는 것은 만족스러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문제를 일으킬 공산이 큰 일이기도 했다. 섬세한 실장님 덕에 되려 정신줄을 놓아버린 것이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덤벙대는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보라카이에 도착해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필리핀 보라카이에서 잃어버린 여권


우리는 인천공항에서 칼리보공항으로 비행기를 타고 이동, 칼리보공항에서 밴을 잡아 까티클란항구까지 이동한 후 보트를 타고 보라카이섬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칼리보공항에서 까티클란항구까지는 무사히 도착했으나 문제는 까티클란항구에서 보라카이섬으로 들어가는 도중에 생겼다.

까티클란항구에서 약 20분 가량 배를 타고 가면 보라카이섬에 도착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배에서 사진을 촬영하던 필자는 렌즈가 들어있던 가방이 사라진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렌즈야 다시 사면 그만이지만 카메라 가방 안에 여권을 넣어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버린 것이다. 결국 실장님께 사실을 이야기했고, 보트에 함께 타고 있던 한국인의 조언을 참고하여 보라카이섬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까티클란항구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같은 한국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생면부지의 남정네에게 도움을 준 두 분의 한국인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까티클란항구로 돌아가는 길은 험하고도 멀기만 했다. 다급한 마음을 추스리려고 노력했지만 타들어가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여권을 분실하면 귀국할 수도 없고 분명 마닐라에 있는 주 필리핀 한국대사관까지 가야해서 이번 여행을 망치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찾으러 오른 배 내부에는 "God bless our trip"이라는 의미심장한 문구까지 새겨져있었다. "신이시여, 제 여권에게도 축복을.."

항구를 돌며 직원들에게 카메라가방이 있는지 물어봐주던 직원(좌)과 카메라가방을 책상속에 보관해놓고 있다가 건네준 직원(우)


까티클란항구에 도착하자마자 경비대로 보이는 한 필리핀 남성에게 여권이 든 카메라 가방을 잃어버렸는데 혹시 찾을 수 있는지 물었다. 작은 체구였지만 다부진 인상을 한 그는 여유있는 발걸음으로 필자를 직원들에게로 인도했다. 칼리보공항에서 까티클란항구에 도착하면 보라카이섬으로 가는 배에 오르기 전에 거쳐야 하는 검색대가 있다. 공항에서 해외로 여행을 갈 때 꼭 거쳐야 하는 검색대처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지품을 올려놓고 맨 몸으로 통과해야 하는 바로 그 곳에 카메라 가방을 두고 온 것이었다. 보라카이 여행객들이 자주 실수를 해서 그랬는지, 침착하게 검문대 앞에 있는 직원에게 필자를 인도한 그는 필리핀어로 다른 직원에게 말을 걸었고 그 직원은 카메라 가방을 꺼내보여줬다. 카메라 가방에는 여분의 렌즈와 여권이 고스란이 담겨있었다.


정신줄을 놓고 있던 필자는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표정으로 카메라 가방을 건네받고 사례비를 건넸다. 적은 금액이었지만 결단코 거절하던 그 직원의 청렴함에 필자는 또 다시 감동을 받았다. "나 같으면 덥썩 받았을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례비를 거절한 그에게 어떻게든 보상하고 싶은 마음에 필자는 사진 촬영을 요청했고, 필리핀 관광청(webmaster@tourism.gov.ph)과 필리핀관광청 한국사무소 공식 네이버 카페(http://cafe.naver.com/phltourism)에 이 직원에 대한 고마움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진촬영을 마치고 직원의 안내를 받아 표를 구입한 후 다시 보라카이섬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여권과 가방을 찾았다는 기쁨과 보라카이섬에서 혼자 필자를 기다리고 있을 실장님에 대한 미안함이 교차했다. 혼란스러운 순간에 한 필리핀 남성이 말을 걸어왔다. 날카롭고 핸섬한 외모에 유창한 영어까지 구사하던 그에게 경계심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SBS의 '그것이 알고싶다'를 즐겨보는 필자는 필리핀 연쇄납치범에 대해 나름의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고, 처음 봤음에도 불구하고 친절하게 다가오는 필리핀 남성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글로벌 무료통화앱 바이버(Viber)의 마닐라 지사 직원 John과 그가 선물해준 바이버 모자, 방수팩, 티셔츠!

 
그는 자신이 모바일앱 바이버(Viber)의 마닐라 지사 직원이며 마케팅 매니저라고 소개했다. 필자가 IT 블로거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한 말이었지만 처음부터 신뢰가 가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휴대폰으로 페이스북 타임라인을 보여줬다. 페이스북에는 거짓의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친구들과의 대화와 사진이 담겨있었고 그 때가 되어서야 그에게 마음을 열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John이라고 소개했고 마닐라에서 Viber의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는 바이버 직원이라고 소개했다. 보라카이에는 바이버의 프로모션 차 약 10일간 머물렀으며 다음날 떠날 것이라고 했다. 블로그 명함을 가지고 있던 필자는 명함을 내밀며 유용한 모바일앱, 유용한 사이트, 블로그 운영 노하우를 소개하는 IT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John은 보트에서 내리면 근처에 자신의 숙소가 있는데 이번 프로모션 때문에 가져온 티셔츠, 모자, 방수팩 등 기념품을 주겠다고 했다. "아니, 처음 본 남자가 뭐가 좋아서 이러는가"라는 의구심이 또 다시 밀려왔다. 일행이 있느냐는 그의 질문에 일행이 인터폴(국제형사경찰기구)에서 일하는데 사건 조사겸 여행겸 겸사겸사 보라카이에 함께 왔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뻥이었다. 온라인 홍보대행사 대표인 실장님이 순식간에 인터폴이 됐지만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John은 마치 인터폴이 여기 올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듯한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아무튼 보트에 내려 기념품을 주고 싶다"고 했다. John과 나는 페이스북 친구가 됐다. 보라카이섬에 도착해 배에서 내리자마자 실장님과 조우했고 John은 우리 둘 모두에게 줄 기념품을 가지고 나왔다. 정말로 Viber 로고가 들어간 모자, 방수팩, 티셔츠를 선물해줬다. John을 연쇄납치범으로 오해한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John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헤어졌다. 실장님에게는 예약해둔 리조트로 향하며 사과를 구했고, 너그러운 마음의 소유자인 그는 실수를 반복했던 필자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호사다마의 교훈과 선입견이라는 어리석음


좋은 일에는 탈이 많다. 호사다마의 교훈 덕에 좋은 일이 생겼다 하더라도 곧이어 안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자신을 추스릴 수 있었다. 반대로 나쁜 일이 생겨도 곧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부정적인 마음을 갖는 것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

필리핀에 방문하기 전에 연쇄납치범에 대한 방송을 먼저 접한 필자는 필리핀과 필리핀인에 대해 좋지 않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보라카이 여행애서 만난 필리핀 사람은 결코 악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물론, 사람은 상대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선하고 누군가에게는 악하게 굴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본 보라카이 사람들은 남에게 베푸는 여유가 있고, 나름의 자긍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이들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필리핀에 대한 선입견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섣불리 사람을 판단하지 말자며 스스로 되뇌였다.